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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가 없는 곳에서의 내비게이션

목적지만 정확히 찍으면 AI가 데려다준다 —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소프트웨어에는 지도가 없어요. 땅이 여행하면서 생기거든요. AI는 길 찾기를 해결한 게 아니라, 길을 그려보고 지워보는 비용을 낮춘 거예요.

2026. 08. 14. 10:20:155분 읽기AI 개발/칼럼
#AI 개발
조회 15
절반만 그려진 항해 지도와 그 경계에서 지도를 이어 그리는 손
지도는 가면서 그려집니다

요즘 개발을 이렇게 설명하고 싶을 때가 있어요.

내비게이션이 생겼다.

목적지만 찍으면 경로는 알아서 나와요. 교통수단의 제약 — 어떤 건 빠르지만 비싸고, 어떤 건 느리지만 확실하고 — 그런 것도 제가 다 외울 필요가 없어요. 조건만 걸어주면 맞는 경로를 찾아오니까요.

그러면 남는 일은 하나죠. 목적지를 정확히 찍는 것.

저도 한동안 이 그림이 맞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여기엔 구멍이 하나 있어요.

내비게이션에는 지도가 있어요

내비게이션이 작동하는 건 지도가 이미 있어서예요.

도로는 누가 측량해뒀고, 그 지도는 모두가 같이 쓰고, 남이 계속 갱신해줘요. 저는 그 위에서 길만 고르면 되고요.

소프트웨어에는 그게 없어요.

코드베이스는 매번 새 대륙이에요. 땅이 여행하면서 생겨요. 지도는 가면서 그려지고, 그리는 사람이 저고요.

그러니까 제가 만든 하네스 — 컨벤션, 레이어 규칙, 화면 정합성 검사 — 는 내비게이션이 아니었어요. 측량 기록이었어요. “이 땅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적어둔 거요.

그리고 측량이 틀리면, 내비게이션은 완벽하게 틀린 길을 안내해요. 틀렸다는 건 도착해봐야 알고요.

목적지를 미리 찍을 수 있었다면

“목적지만 정확히 정의하면 된다”는 말에는 더 큰 문제가 있어요.

그게 가능했다면 이미 성공했어야 해요. 명세를 앞에서 전부 쓰고 그대로 만드는 방식, 소프트웨어 업계가 수십 년 시도했고 대부분 실패했잖아요.

명세 쓰는 사람이 게을러서가 아니에요. 뭘 원하는지는 만들어봐야 알게 되는 경우가 많아서예요.

사용자도 자기가 원하는 걸 정확히 몰라요. 기획자도 모르고, 저도 모르고요. 만들어서 만져본 다음에야 “아, 우리가 원한 게 이게 아니었네”를 알게 되는 거죠.

그래서 AI가 정말로 바꾼 건 이거라고 생각해요.

정답을 싸게 만든 게 아니라, 틀린 가설을 시험하는 비용을 낮춘 거예요.

지우개 자국이 가득한 항해 지도와 진하게 남은 항로 하나
지워진 항로들이 실패가 아니라 기록입니다

다만 모든 일이 그런 건 아니에요

“목적지는 가봐야 안다”를 너무 세게 말하면 그것도 틀려요. 목적지가 처음부터 명확한 일도 많거든요.

배달 모드탐색 모드
목적지명확함가봐야 앎
예시세금계산서 발행, 응답 속도 기준 충족, 디자인 시안 그대로 구현사람들이 어떤 협업 도구를 원할까
중요한 것싸고 정확하게 도착빨리 여러 곳을 찍어보고 배우기
AI의 역할정확한 실행탐색 비용 인하
고속도로를 달리는 트럭과 안개 속을 흩어져 탐색하는 정찰선들
같은 세계의 두 지역이에요. 한쪽엔 지도가 있고, 한쪽엔 없어요

제품 만들기는 이 둘 사이를 계속 왔다 갔다 해요.

아는 부분은 명세하고, 모르는 부분은 실험하는 거예요.

(제 하네스가 강한 건 배달 모드예요. 기획과 디자인이 나오면 하루 만에 도착하는 것. 탐색 모드에서 하네스가 하는 일은 달라요 — 찍어보는 비용을 낮춰주는 거요.)

콜럼버스는 사실 반례예요

“목적지를 잘못 찍으면 망한다”의 예로 콜럼버스를 떠올리기 쉬워요. 아시아로 간다고 떠났는데 엉뚱한 대륙에 도착했으니까요.

그런데 역사적으로 그 도착은 원래 목적지보다 훨씬 큰 성과였잖아요.

소프트웨어에서도 같은 일이 반복돼요. 게임 회사의 사내 메신저가 제품이 되고, 팟캐스트 회사의 부산물이 소셜 미디어가 되고요.

탐색이 싸진 세계에서는 잘못 도착한 곳이 보물일 확률도 같이 올라가요. 중요한 건 정확히 찍는 게 아니라 도착한 곳이 어디인지 아는 것이에요.

아시아라고 우기면 망하고, 새 대륙이라는 걸 알아보면 흥하는 거죠.


하네스는 지도가 아니라 도시계획법이었어요

여기까지 오니까 제가 만든 것의 정체가 좀 더 정확해졌어요.

하네스 규칙 중에 이런 게 있어요. 화면 계층은 데이터 계층에 직접 의존하면 안 된다.

이건 “현재 도로에 통행금지가 있다”는 기술이 아니에요. 우리가 도로를 그렇게 건설하기로 결정한 것이에요.

지도도시계획법
말하는 것땅이 이렇게 생겼다이렇게 지어야 한다
성격기술규범
틀리면다시 측량법을 고쳐야 함

그리고 법에는 지도에 없는 게 하나 필요해요. 폐기 절차요.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어요. 반복 개발이 계속 굼떠서 봤더니, 전체를 매번 다시 분석하는 구조 자체가 문제였어요. 규칙을 지키는 게 문제가 아니라 그 규칙 아래의 도로 설계가 틀렸던 거예요. 그래서 패키지별로 변경된 것만 다시 보도록 도로를 다시 깔았어요. 첫 편에서 얘기한 8.2초가 2.2초가 된 그 일이요.

새 도로를 놓으며 다른 손으로 기존 도로를 뜯어내는 도시계획가
법은 폐기 절차가 있어야 법입니다

규칙을 만드는 건 셋째 편에서 얘기했어요. 그런데 규칙을 버리는 것도 같은 일의 절반이에요. 자꾸 막히는 길이 있으면 “운전을 잘하자”가 아니라 “도로 구조가 틀렸나”를 물어야 하니까요.

그래서 일의 모양이 이렇게 바뀌었어요

정리하면, 예전 일은 직선이었어요.

요구사항 → 구현 → 완료.

지금 일은 고리예요.

단계하는 일누가
가설뭐가 가능할까, 뭐가 필요할까사람
제약무엇을 지켜야 할까사람 + 하네스
실행만들기AI
판정이게 좋은 결과인가사람
갱신이번 결과로 지도와 법을 어떻게 바꿀까사람

AI가 가져간 건 셋째 줄 하나예요. 그런데 그 줄이 싸지니까 고리 전체가 빨리 돌고, 고리가 빨리 도니까 나머지 줄의 값이 오르는 거예요.

특히 마지막 줄이요. 한 바퀴 돌 때마다 지도가 갱신 안 되면, 빨리 도는 게 의미가 없거든요. 같은 자리를 빠르게 도는 것뿐이니까요.


그래서 이 시리즈의 결론은 이거예요

다섯 편 내내 돌아온 질문이 “AI 시대에 사람에게 남는 게 뭔가”였어요.

이제 이렇게 답할 수 있을 것 같아요.

AI는 길 찾기를 해결한 게 아니에요. 길을 그려보고 지워보는 비용을 낮춘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에게 남는 건 목적지를 한 번에 정확히 찍는 능력이 아니에요. 그건 워터폴이 실패했을 때 같이 실패한 꿈이에요.

남는 건 이거예요.

잘못 도착했다는 걸 빨리 알아채는 것. 그리고 그때마다 지도를 고치는 것.

(첫 편의 오라클, 둘째 편의 세는 칸, 셋째 편의 한 자리, 넷째 편의 겪은 지도 — 전부 이 문장의 다른 각도였더라고요.)

제가 틀렸다면 이런 모습일 거예요

하나. AI가 도착 판정까지 잘하게 되면 — 만든 걸 보고 “이건 당신이 원한 게 아닌 것 같다”를 사람보다 잘 알아채면 — 고리에서 사람 줄이 하나 더 지워져요. 그때는 이 글을 다시 써야 해요.

둘. 탐색 모드가 제 생각보다 좁을 수 있어요. 대부분의 개발이 사실 배달 모드라면, “목적지만 잘 찍으면 된다”가 실무적으로는 맞는 말이 돼요. 제 일이 탐색처럼 보이는 건 제가 초기 제품을 만들고 있어서일 수도 있고요.

셋. 그리고 “지도를 고치는 사람”도 결국 한 명이면 될지 몰라요. 셋째 편의 질문이 여기서도 그대로 살아 있어요. 저는 아직 답이 없고요.

이 이야기는 다섯 편째고, 아마 여기서 한 매듭이에요.

첫 편에서 “아는 게 능력이던 시절이 끝났다”고 썼는데, 다섯 편을 돌아서 도착한 곳은 이거네요.

아는 것의 자리는 줄었는데, 알아차리는 것의 자리는 오히려 커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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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시대에 남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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